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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장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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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며느리를 처형한 장제스
이름
유화웅
등록일
2020-12-17

장제스(蔣介石 1887-1975) 타이완 총통이 1907년 일본육군사관학교 다닐 때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는 중국인 사관생도가 유학하고 있었는데 일본 생도와 구별해서 화장실을 중국생도 전용으로 사용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제스 생도가 입학하면서 중국생도 화장실이 일본 생도의 화장실보다 더 깨끗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본사관학교교장은 근무자에게 밤새도록 지켜서 알아보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2시쯤 중국인 생도의 기숙사 문이 열리면서 한 학생이 청소도구를 들고 나와 화장실로 가서 비눗물로 깨끗이 청소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가 바로 장제스였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사관학교 교장은 ‘장제스’는 세계에 기여하는 큰 위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장제스(蔣介石) 전 타이완 총통은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쑨원(孫文)의 신임을 받아 황푸 군관학교 교장으로 나중에 1926년에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중일전쟁 중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중국은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46년부터 내전으로 공산군에 밀려 타이완으로 패퇴했습니다.


1948년부터 1975년까지 중화민국 총통을 역임했습니다.


어려서 유교와 불교의 환경에서 자랐고 자라면서 서양철학을 접한 사색적 지도자였고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1927년 송미령(宋美齡 쑹메이링)여사와 결혼한 후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교, 불교의 바탕 사상이 기독교와 통한다는 신념으로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상대적 양심을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신념이나 신조가 통하지 않으면 강제력을 이용해서도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는 독선적인데가 있었습니다.

쑨원선생이 사망한 후 국민당 내의 좌익을 척결하고 국민당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중국을 통일하기위해 많은 반대세력들과 싸워 승리를 해서 1928년 중국 통일을 이루어 내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일본 침략 후 일본과 싸우면서 20여년간을 말(馬) 안장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훈련받지 못한 군인들에다가 제대로 된 개인 무기도 없고 총탄지급도 제대로 안 된 군인으로 일본과 싸워야 했고 중국공산당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런 군인들에게 작전이나 전략이 적용될리도 없고 오직 한가지 엄격한 군율(軍律)로 채찍하며 다그치는 것이 군통수체계였다고 하겠습니다.


중국군의 수적(數的)인 우세만 믿고 일본군과 맞서기는 했으나 일본군에게 번번히 당하였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세계 제2차대전 참전국이 되어 장제스는 영국의 처칠 총리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대등한 영수회담을 카이로에서 하여 1914이래 일본이 점령한 중국 땅을 반환받는 이익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U.N의 상임이사국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홍군(紅軍)에 패하여 중국 대륙은 공산화되었고 1948년 장제스는 대만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장제스는 본토의 패배 이유를 사회개혁 부재와 지도부의 심각한 부정과 부패라고 인정하고 대만에서는 토지개혁으로 서민생활안정화와 공업국의 기반을 조성하고 9년간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고 국민복지에 힘써 짧은 시간안에 경제 부국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가족부터 청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조카 며느리가 밀수혐의를 받아 가택수사를 했습니다. 많은 양의 보석이 나왔다고 합니다.


장제스는 조카며느리를 불러서 보석상자를 선물하고 이것이 마지막 식사라며 식사를 하였습니다.

조카며느리가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보석 상자속에 권총이 한 자루 들어 있었습니다.


결국 조카 며느리는 자살하였습니다. 일벌백계의 교훈을 국민에게 보여주어 국민에게 신뢰를 얻었습니다.
일본 사관학교 생도로 보여주었던 동족애와 자존심은 국가 통치자가 되어서도 엄격했던 법치(法治)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국민통제를 위해 장기간 계엄령 시행으로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독재권력을 행사한 것은 며느리 처형의 청렴성 만으로는 상쇄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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